엄마는 바빴다. 네 딸과 여덟 손주를 번듯하게 키워내느라 손이 마를 새 없었다. 어릴 때부터 1등을 놓친 적 거의 없는 똑순이 엄마는 서울대에 입학했지만 졸업과 동시에 자신의 이름을 잊고 살았다. 대학 때 만난 남편과 결혼하면서 주부로서의 삶만 덩그러니 남았다. 그 역할도 치열하게 해냈다. 딸들을 교수로, 의사로 남부럽지 않게 키워내고 이 손주 저 손주 돌아가면서 봐주느라 하루 종일 세수를 못할 때도 있었다.그러던 삶에 변곡점이 찾아왔다. 아이들이 하나둘 독립하면서 여유가 생겼고, 남편까지 세상을 떠났다. 텅텅 빈 시간에는 슬픔이
“저는 액션건축가입니다.”액션을 건축한다고? 맞다. 그녀의 직업은 행동을 만들어주는 사람이다. 그가 무언가를 벌이면 사람들이 모였고, 대부분은 현실화됐다. 사람들은 그를 ‘실행의 신’ ‘액션가’로 불렀다. 생각을 현실로 옮기는 데 귀재다.이슬기. 서른넷밖에 안 된 여성이다. 대학 졸업 후 고작 8년. 그중 절반인 5년은 삼성카드 마케팅부서 직원으로 일했다. 이후 그가 벌이고 실행한 일들은 많아도 너무 많다. 열거만 해도 한 장 꽉 찰 듯하다. 몇 가지만 보자. 셰어하우스 We.R설립 및 대표, 출판사 FUNZIP 대표, 그룹 ‘일기
“이 두근거림, 사춘기 이후 처음 느껴봅니다. 인생이 줄곧 내리막길 느낌이었죠. 의과대학 교수가 되어서는 좀비에 가까운 삶이었어요. 살아남기 위해 밤을 새워 연구를 하고 논문을 썼습니다. 안정된 직장을 위해 영혼은 점점 굳어져갔어요. 계속 그런 삶을 살았다면 이런 두근거림은 다시 없었을 겁니다.”연세대 의대 강남세브란스병원 정태섭(63) 교수. 그는 영상의학과 분야 명의로 손꼽힌다. EBS 명의로 선정되기도 했다. 그에겐 멋들어진 타이틀이 하나 더 있다. 최초의 엑스레이 아티스트. 그는 이 타이틀을 갖게 되면서 “가슴이 다시 뛰기
온갖 견공들이 미국 뉴욕 유엔본부 앞에 모였다. 자연주의 화장품 더바디샵(THE BODY SHOP)의 동물실험 반대 캠페인에 동참하기 위해서다. 인간 가까이에서 인간에게 기쁨과 위안을 안겨주는 반려견들이 ‘동물실험 반대’ 푯말을 목에 걸고 어딘가를 애처롭게 바라본다. 더바디샵은 1993년부터 동물실험반대 캠페인을 꾸준히 해왔다. 이런 노력은 유럽연합(EU)으로부터 2013년부터 유럽에서 판매되는 화장품의 동물실험을 금한다는 결실을 이끌어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지구촌 어딘가에서는 동물실험이 자행된다. 그렇게 희생되는 동물이
한때 X세대의 존재감은 막강했다. 1990년대 초중반 ‘서태지와 아이들’을 소비하며 화려하게 등장한 이 세대의 취향과 사고방식은 파격이었다. 천편일률적 문화에서 벗어나 개성을 존중하고 표현하기 시작한 이들은 기성세대와는 확실히 달랐다. 오죽하면 ‘신(新)세대’ ‘신인류’로 불렸을까. 산업화·민주화 물결이 한차례 휩쓸고 간 X세대에게 관심사는 ‘나 자신’이었다. 개인주의 세대의 탄생을 알리며 등장한 이들은 기존 질서를 전복해 세상을 바꿀 것처럼 떠들썩했다.2018년 현재, 그 많던 X세대는 어디로 간 것일까? X세대는 언제부터인가 세
‘뇌도 다 자라지 않은 갓난아이가 뭘 알까?’라고 생각한 부모가 있다면 꼭 알아야 할 개념이 있다. 바로 ‘애착손상’이다. 애착손상이란 위기상황에 처하거나 중요한 욕구가 있을 때 돌봄을 기대한 대상으로부터 버림받은 상처를 말한다. 애착(愛着)의 핵심은 ‘내가 도움이 필요할 때 달려와주고 내 편이 되어줄 것이라는 믿음’이다. 중요한 것은 애착형성 시기가 만 2세 무렵까지라는 것. 이 시기에 애착형성이 되지 않으면 평생에 걸쳐 두고두고 트라우마를 남긴다.애착 개념이 주목받은 건 최근 들어서다. 한국은 애착손상 개념이 생소하지만, 세계심
2018년 새해 첫날 밤, 휘영청 밝은 달이 떴다. 수퍼문(Supermoon)에다 울프문(Wolfmoon)이다. 수퍼문은 보름달이 지구 가장 가까운 지점을 지나는 달, 울프문은 매년 처음 뜨는 달이다. 이 둘이 겹치는 것은 아주 희귀하다. 일반 보름달보다 14% 크고 30% 더 밝은 수퍼문. 수퍼문이 새해 첫날 찾아왔으니 좋은 징조다. 그야말로 밝은 새해가 밝았다. 올 한 해 저 달처럼 밝은 일이 가득하길…. 지난 1월 1일 밤 서울 여의도 LG쌍둥이빌딩 사옥 사이로 보이는 수퍼문.
지난해 12월 19일,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에는 “서울 □□초등학교 학교폭력 진상조사 촉구”라는 청원글이 게재됐다. 학교폭력에 시달리던 6학년 남학생이 유서 같은 편지를 품고 아파트 8층에서 투신한 서울 성동구 □□초등학교 사건에 관련한 글이었다. 커뮤니티 등을 통해 피해학생의 부모가 쓴 장문의 글을 읽은 학부모들은 “남 일 같지 않다”며 분노했고, 청원글로 몰려가 대거 서명했다.그러나 다음 날 해당 글이 삭제됐다. 12월 20일 “□□초 투신 청원 글 삭제” “아까 글이 삭제돼서 재청원합니다” 등 비슷한 글이 줄지어 올라왔지만
한때 카톡을 끊은 적이 있습니다. 카톡의 과도한 개방성, 단톡방의 반강제적 속성 때문에 피로감에 시달리다가 과감히 앱을 삭제했습니다. 한동안 좋았습니다. 신세계가 펼쳐지더군요. 나만의 시간이 늘어나면서 마음이 한결 고요해졌습니다. 카톡의 자잘한 대화로부터 자유로워지니 ‘응대할까, 말까?’ ‘한다면 언제 어떤 말로?’ 식의 잔신경을 쓰지 않아도 됐습니다. 머릿속에서 늘 가동하던 방 하나가 삭제된 기분이랄까요.하지만 얼마 못 가 다시 앱을 깔았습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깔아야 했습니다.” 주변인들이 다 사용하는데 혼자만 안 하니 민폐
1988년에 초판이 나왔으니 꼭 30년째다. 소설가이자 역사가 송우혜씨가 쓴 ‘윤동주 평전’. 평전문학의 전범, 윤동주 연구서의 결정판이라고 불리는 이 책은 평전으로서의 가치를 훌쩍 뛰어넘는다. 윤동주의 29년간 생애를 촘촘히 들여다보는 작업은 독립운동사와 일제치하로 점철된 엄혹한 역사를 파헤치는 일이기도 했기 때문이다.북간도 역사를 깊이 있게 연구한 사학자로서 송 작가가 새롭게 밝혀낸 사실이 꽤 된다. 윤동주의 고종사촌 형이자 동갑내기 학우 송몽규의 무덤을 찾는 데 결정적 자료를 제공했고, 윤동주 시에 쏟아진 ‘역사의식 과잉’이라
“카톡!”소리에 잠을 깼다. 아직 해뜨기 전. 시계를 보니 5시45분이다. 어제 업무로 만나 명함을 주고받은 60대 지인에게서 온 톡이다. ‘스승은 가까운 곳에 있다’는 제목으로 시작하는 장문의 글. 중국 고대 송나라 때 재상에 얽힌 이야기가 읽기 좋게 정리돼 있다. 짧은 호흡의 문장이 적당한 단락으로 나뉘어 있고, 중간중간 중요한 부분은 압정 모양의 이모티콘이 박혀 있다. 작은 폰트로 조정을 해두었는데도 두 화면이 훌쩍 넘는 긴 글이다. 맨 마지막 단락엔 ‘오늘의 명언’이 한 번 더 정리된다. “말하는 것은 지식의 영역이고 듣는
눈이 내렸다. 눈꽃이 피었다. 잔가지마다 잎새마다 빠짐없이 핀 눈꽃 덕에 온 산이 겨울왕국이 됐다. 어쩜 이리 눈부실까. 햇살을 많이 받은 눈꽃일수록 눈부시다. 그러나 찰나의 눈부심이다. 곧 저 햇살에 스르륵 녹아 사라져버리겠지. 시한부 아름다움이다. 햇살 받은 눈꽃은 더 빛나지만 짧은 생을 살다 간다. 그늘에 숨은 눈꽃은 덜 빛나지만 오래 머물다 간다. 사람도 대체로 이 같지 않을까. 굵고 짧은 삶과 가늘고 긴 삶. 지난 12월 4일 강원도 평창군 발왕산 일대가 새하얀 눈으로 뒤덮였다.
배우 유아인이 작정하고 선전포고한 페미니즘 전쟁이 점점 가열되는 양상이다. 한 네티즌과 ‘어이가 없는’ 상황에서 시작된 설전은 의외의 상황들과 맞부딪히면서 다양한 담론을 낳고 있다. 진짜 페미니즘과 가짜 페미니즘 논쟁, 익명의 다수가 실명의 개인에게 가하는 온라인 테러리즘 논쟁 등. 처음엔 몇 번 저러다 잠잠해지겠지 싶었다. 하지만 형세가 심상치 않다. 그동안 온라인 공간에서 끓어오르던 페미니즘 담론들이 폭발한 모양새다. 유아인이 촉발시킨 논쟁은 온라인에서 찬반 양론으로 갈려 난타전으로 치닫고 있다.설전(舌戰)의 진행 상황을 간략하
“우리 땐 다 맞고 컸어. 뺨도 맞고, ‘빠따’도 맞았어. 다 그러면서 크는 거지 뭐.”이런 추억담(?)은 이제 전설이 될 듯합니다. 학생인권조례에 따르면 체벌이 일절 금지됩니다. 개정 조례안에 따르면 벌점제도 금지입니다. 소지품 검사도 안 되고, 휴대폰을 학생의 의사에 반해 일률적으로 걷어서도 안 되며, 복장규제도 안 됩니다. 요는 학생은 ‘교복 입은 시민’으로서 자유를 누릴 권리가 있다는 겁니다. 일면 환영합니다. 원칙 없는 체벌을 남발하는 교사들, 과도한 권위의식을 내세우는 교사들로 인해 상처받는 아이들이 얼마나 많았습니까.
서울 A사립학교 과학담당 김모교사는 학생 사이에서 ‘천재쌤’으로 통한다. 학생들이 아무리 엉뚱한 질문을 해도 일일이 답해주고, 아이들이 좋아할 만한 과학 관련 행사를 자주 기획한다. ‘어떻게 하면 수업을 재미있게 이끌까’를 고민하는 김 교사는 온갖 도구와 동영상을 수업시간에 활용한다. 김 교사의 수업을 들은 아이들은 “과학이 쉬워졌어요”라는 얘기를 많이 한다. 과학에 흥미를 갖게 되면서 공부 자체의 재미를 찾은 학생도 있다. 하지만 김 교사의 교원평가등급은 B등급. 최하위다.같은 학교 영어담당 박모 교사의 별명은 ‘이사도라’다. 2
“체벌이 전면 금지되고, 상벌점도 유명무실해지면서 사실상 학생들을 지도할 수 있는 통제수단이 거의 없어졌습니다. 사회적 합의 없이 너무 급진적으로 학생인권이 강조되다 보니 교실에서 난감할 때가 많아요. 말로 훈육을 해야 하는데, 이것도 잘못하면 언어폭력이 될 수 있거든요.” (울산 A초등학교 박모 교사)“너무 급작스럽게 학생인권과 교권의 위상이 역전됐습니다. 이 둘은 대립각을 세워야 하는 부분이 아니잖아요. 학생의 인권이 중요한 만큼, 교사의 인권도 보호받아야 하는데 현재는 그렇지 못합니다. 교사로서 사명감이 유독 투철했던 한 젊은
평창 동계올림픽 D-84, 11월 15일. 성화는 경남 창녕군 우포늪을 건너고 있다. 봉송주자는 환경지킴이 주영학씨. 2018 평창 동계올림픽의 성공 개최를 기원하는 마음, 태곳적 신비를 간직한 우포늪의 생태가 고스란히 보존되길 바라는 마음을 함께 실어나른다. 우포늪의 어슴푸레 새벽녘을 밝히는 성화가 유독 밝고 희망 차 보인다. 성화 봉송에는 7500명의 주자와 2018명의 지원주자가 참여해 101일간 2018㎞를 달린다.
이건 아니다 싶었다. 가족이 무너지고 있었다. 방향 없이 끌려다녔다. 욕망의 문화, 돈의 환상, 과대포장된 대학, 생각 없는 공부, 판단 없는 열심, 이웃이 빠진 성공신화에….주위를 둘러보았다. 저마다 크고작은 병을 앓고 있었다. 아빠는 돈벌이에 바쁘고, 엄마는 진학교육에 바쁘고, 아이들은 정해진 공부에 바빴다. 가족이 조각나고 있었고, 본연의 가치를 점점 상실해갔다. 다들 잘못됐다는 걸 알면서도 순응했다. 자잘한 오류가 가득한 거대한 시스템에서 빠져나오기란 쉽지 않았다. 이 가족은 과감히 빠져나왔다. 첫째가 중1, 둘째가 초5를
“기사 앞부분 여자 말야, 꼭 나 같아.”친구에게서 문자가 날아들었습니다. 이번주 유독 주변인들에게서 “기사 잘 봤다”는 연락을 많이 받았습니다. 반응은 비슷했습니다. 다들 자신 이야기 같다는 겁니다.지난주 커버스토리에서 ‘자존감 상실의 시대’를 다뤘습니다. 앞부분에서는 자존감이 낮은 40대 초반 여성의 사례를 소개했죠. 스펙만으로 보자면 남부러울 것 없는데, 스스로는 늘 부족하다고 생각하면서 ‘왜 나만 이럴까’라는 열등감에 사로잡혀 사는 여성들입니다.몇 년 전부터 유독 ‘자존감’이라는 키워드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지난해 출간된 ‘
계절의 경계가 호수의 경계에 담겼다. 가을과 겨울 사이, 호수에 내려앉은 자욱한 물안개가 만든 풍경이 꿈인 듯 현실인 듯 아슴푸레하다. 영화 ‘마이 리틀 자이언트’의 한 장면처럼 초현실적이다. 영화 속에서는 호수의 경계가 현실과 꿈의 경계였다. 저 투명한 호수 속으로 퐁당 빠져들면 환상적인 꿈속 세계가 펼쳐졌지…. 지난 11월 6일, 경남 남해군 삼동면 내산마을 인근 산기슭 호수의 늦가을 정경.